한 일본 영화 프로덕션은 이 영화제에 출품을 취소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판매자가 팔겠다고 내놓은 책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차마 구매하겠다는 댓글을 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꼼수를 생각해냈다. 판매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메일 계정을 이용해서 책을 사겠다는 메일을 보낸 것이다. 판매자에게 금세 답장이 왔다. 그 책을 나에게 팔겠단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나를 기겁하게 했다. 팔긴 팔겠는데 혹시 저번에 본인이랑 댓글로 대판 싸운 '박 선생'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저번에 나랑 싸운 뒤라 민망해서 다른 이메일 계정으로 연락한 것이 아니냐"라는 정확한 추측까지 덧붙였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난 당신과 처음 거래한다"라고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기 안으로 후퇴하고 침식되다 죽음을 선택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대의에 매료되어 뜬구름 잡는 뜨거움을 주장하다가 허황된 죽음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를 서로 완전히 상반된 두개의 이미지로 비교한다. 그러나 나는 저 둘이 서로 완전한 닮은꼴이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사람은 자기 존재가 버거워 그것을 감싸 안으며 안으로 끝없이 파고들어갔다. 다른 하나 역시 자신을 버거워했으나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천황과 일본의 무장을 핑계로 '극기'와 '남자다움' 따위에 한없이 매료되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매체들이 움직이기 전에 소셜 미디어가 먼저 움직였다. 소셜 미디어가 움직이자 매체가 움직였다. 한국 매체가 움직이자 BBC, 가디언 등 해외 매체가 움직였다. 신경숙 표절 사태는 국민적 우상의 성전에 거울을 비추는 시도이자, 소셜 미디어가 어떻게 역으로 주류 매체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어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만약 아이유가 출처를 밝히지 않고 특정 문장 등을 '훔친' 것이라면 당연히 출판사가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겠으나 이번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유통되는 작품의 해석을 두고, 그것도 다른 아티스트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한 창작물을 두고 왈가왈부할 이유는 출판사에 없다. 혹 작가와의 사전조율이 있었다면 달리 바라볼 여지가 있겠지만 원작자는 31년 전에 세상을 뜬 외국인이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는 견해는 신경숙 작품들에 대한 그간의 비평과 대중의 반응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명성을 얻었고 작품 수도 많은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신경숙 또한 걸작과 졸작을 모두 생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작가가 한두 작품의 몇몇 구절에서 표절로 판단할만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점에 근거해 그의 작품 전체를 쓰레기라는 듯이 발언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한다. '상습적 표절,' 그러니까 도벽이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해석해치우는 것은 자비의 원칙에 입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도적 절도로서의 「전설」이나 상습범 신경숙을 단정했다가 그간의 논의를 통해 '의도'를 가정한 비난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새삼 발견한 것이라면 스스로 그러한 비난에 얼마나 동조했는지도 솔직히 밝히는 게 옳다. 또한 그동안 신경숙의 '의도적 베껴쓰기'를 인정 안한다고 창비에 퍼부은 공격은 어찌되는 것인가. 창비가 다른 많은 것을 더 했어야 한다는 비판은 마땅히 감수해야 하겠지만 창비의 '묵언'과 '입장표명'은 '의도'에 대한 단정을 근거로 한 작가를 매장하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신경숙의 사과에 대해 대다수 비판자는 의도적 베껴쓰기를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격을 계속했으며 창비의 머리글이 계속해서 비난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정형화시켜 놓고, 그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창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판자들은 훨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응준 소설가가 신경숙 표절을 지적하던 바로 그날 페이스북 댓글에 "이 글로 신경숙 작가의 수작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당연히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김종엽 편집위원의 주장대로 신경숙 "작품 전체를 쓰레기"로 보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창비가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자비의 원칙을 논하려면 남들에게 그 원칙을 들이대기 전에 김종엽 혹은 창비는 자신들에게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김종엽은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라고 불평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창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 창비는 그동안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비평에서 자비의 원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비판의 원칙은 어디 갔는가.